《부경에세이》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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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에세이》모자
  • 부경신문
  • 승인 2019.08.14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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晩步  박태병

◎ '한국인문학' 등단

◎ 한국문인협회 회원

내게는 애용하는 모자가 몇 개쯤 있다. 그런데도 그 고마운 전철, 어느 환승장 길목에 있는 싸구려 매장에서 괜찮은 모자 하나를 발견하였기에 오천 원을 주고 그것을 샀다. 그리고 그 싸구려 모자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열심히 쓰고 다녔다. 모자가 여러 개 있지만, 그것이 맘에 들고 머리에 올려놓으니 쓰기에 편안하였다. 머리숱이 제법 빠져 빈들이 되어가는 머리를 덮어줄 겸 몇 년을 불편한 줄 모르고 애용하였으니 나의 분신이 되었나 싶다. 집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명절이나 기념일에 새 고급 모자를 몇 개나 마련하고 써보라고 강권하였지만, 선물한 사람의 성의를 생각해서 한두 번쯤 착용했을 뿐 오천 원짜리 모자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 모자에 대한 집착은 병적이었다.

수필작가로 제법 알려진 나는 그 모자를 눌러쓰고 모임에 나가면 이제는 ‘작가답다.’는 소릴 듣게 되었다. 모자와 내 모습이 잘 어울려 작가 냄새가 난다는 말이니 그처럼 듣기 좋은 말은 없었다. 오천 원짜리 모자에 담은 애착이 깊어져서 최근에는 그 모자를 서재 책상머리 제일 좋은 곳에 걸어놓고 보물처럼 잘 모시고 있다. 요즘은 그 모자를 아껴 쓰려고 다른 모자를 열심히 쓰고 다니기도 한다. 그 모자를 쓸 때만큼 넉넉한 여유와 편안을 안겨주지 못하니 작은 것에 소홀하지 못하는 편벽증을 언제나 벗어날 수 있을까. 전철에서 모자로 이어지는 나의 쪼잔한 취향이 버려야 할 악습일까. 내 가족은 찌들고 가난했던 역사를 잊어버리라 한다.

소비가 미덕이라고 경제를 살리려면 지갑을 열라고 한다. 소비와 생산, 지출과 수입이 잘 돌아가야 윤기가 도는 세상이 온다니 그 원리를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단지 분수에 맞는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삶이 소중하다는 전제가 깔리면 든든하지 않을까. 베블렌효과를 노리고 마케팅하는 상술이 나 같은 소시민에게는 어림도 없는 짓이지만, 그런 어리석음도 있어야 세상은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상류층 소비자의 낭비행태와 상류층을 선망하는 소비자의 소비행태가 무시되면 세상은 황무지 같아서 살고 싶은 매력이 없어질지 모른다.

‘아버님은 왜 그 모자만 애용하세요?’ 너절한 모자를 쓰고 다니는 나에게 백화점에서 고급 모자를 구매해 선물한 둘째 자부의 항의성 질문이었다. 나는 며느리 앞에서 오천 원짜리 모자를 쓰고 모델처럼 무게를 잡아 보이며 ‘이제 그 이유를 알겠느냐?’ 물었다. 머뭇거리던 자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네, 알겠습니다.’ 나의 결백을 증명한 쾌재를 느꼈지만, 자괴감에서 쉽게 풀려나질 못했다. 그를 눈치를 챈 자부의 역습이 재치가 있었다. ‘아버님, 그렇게 그 모자 쓰시고 파이프 담뱃대만 입에 무시면 더 멋있겠는데요. 빈 담뱃대만 물고 계셔도 헤밍웨이나 윈스턴 처칠처럼 근사하겠어요.’

다양하고 복잡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거들먹이지 않아도 나는 이런 투정을 받고 살아야하지 않을까. 장로에게 멋으로 파이프 담뱃대쯤은 괜찮지 않으냐는 제안은 아량으로 접수해야 할 줄도 알아야 하리라. 가족들은 오천 원짜리 모자를 쓰고 다니는 가장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백화점에 가서 소위 메이커로 소문난 브랜드가 붙은 모자를 수십 배 더 주고 비싼 것으로 샀겠지만, 나에게 베블렌 효과를 기대하기엔 어림도 없었다. 그런 과소비와 허세 같은 행위로 빈부격차를 모자에서까지 표시하려 한다면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은 슬퍼질지 모른다. 오히려 보잘것없는 것으로 더 큰 착각을 불러 모은 나의 폐습이 역으로 베블렌 효과를 유발하여 낸 것은 아니었을까.

사람들은 머리를 보호하는 장식품으로 모자를 쓴다. 멋과 사색을 창출하는 셈, 머리를 덮고 아껴야 할 것을 모자로 감추어주면 더 편안하고 넉넉하여지지 않는가. 두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고 숨기지도 못하는 전쟁터에서는 머리에 무거운 철모를 씌우지 않았는가. 가성비가 낮아도 그에 연연하지 않고 나의 싸구려 멋쟁이 모자를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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