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경에세이》틀을 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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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경에세이》틀을 깨다
  • 부경신문
  • 승인 2019.08.1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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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애

◎ '에세이문예'로 등단
◎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미주지부장

기내는 조용하다.
창문 덮개가 모두 닫혀 있어 밖이 환한지 어두운지 가늠이 안 된다. 몇 시간을 잤는지, 어느 상공을 날고 있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대부분 승객은 잠을 자거나 독서등 아래서 뭔가를 하거나 헤드폰을 낀 채 영화를 보고 있다. 기내에 흐르는 적막한 기류가 묘하게 편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봐야 할 원고가 있어 랩탑을 켰다. 누군가 열어주길 애타게 기다렸던 것처럼 푸른 화면이 어둠을 가르고 열렸다. 블랙홀로 빠지는 게 아니라 구멍이 메워지면서 뭔가 거꾸로 올라오는 느낌이랄까. 암튼 그 강한 빛에 지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아니, 시리다는 핑계로 울고 싶었다. 좋은 일 뒤엔 왜 나쁜 일이 따라오는 걸까. 야속하다. 진통제가 통증을 줄여주었다. 아픈 와중에도 랩탑을 충전한 거 보니 책임이란 게 무겁긴 한 모양이다. 플러그를 꽂게 했으니 말이다. 무의식 속에서조차 지키려 애쓴 덕분에 긴 세월 동안 원고를 펑크 낸 기억은 없다.

컴퓨터 시계가 나처럼 정신을 놓았는지 2017년 5월 14일 오전 8시 10분이다. 과거로 돌아간 것도 아니고 2017년이라니, 고장인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멈춘 게 아니다. 시간은 현실과 마주칠 일이 없을 만큼의 거리를 둔 채 쉬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있다. 보폭을 좁히거나 넓히지 않고 제 페이스를 지킨다. 그래서 숨통이 트인다면 놔두고 싶다. 굳이 현실로 끌어내 왜 너만 늦느냐고, 너를 사느라고 쏟은 돈이 얼만데 정신을 못 차리느냐고 닦달하며 초침을 돌리고 싶진 않다. 그저 살아 있으면 되는 거다. 어차피 비행기가 땅을 밟는 순간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까.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이라는 드라마를 본 적 있다. 모든 걸 잃은 선우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아홉 개의 향이 생긴다. 향이 켜있는 동안 과거의 시간 속으로 돌아가 현실적으론 불가능한 일을 해결하고 돌아온다. 그 일을 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은 가족이었다. 그가 친구에게 “2013년의 내가 1993년의 과거에 가서 죽었다. 그럼 그건 미래에서 일어난 일이니까 내가 막기만 하면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하고 통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나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1993년이 아니라 그보다 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한다면 기꺼이 향을 켜고 돌아가 모든 걸 제자리로 돌려놓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측정할 수 없는 가족이란 굴레의 무게를 덜고 싶었다. 잘못된 선택은 멍에가 되어 스스로 내려놓지도 못하고 끌려다녔다. 한 번뿐인 인생, 잘못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잘살아보려 애써도 타의에 의해 잘못되는 경우도 있다. 

늘 과거형으로 글을 썼다. 일초 전 일을 곧바로 기록한다 해도 이미 그 상황은 과거이므로 반드시 과거형으로 써야 한다고 제자들에게도 가르쳤다. 아직은 과거로의 접근이 두렵다. 풀어야 할 숙제가 있음에도 아픔이 현재로 소환되는 것이 두려워 과거라는 틀에 가두고 파헤쳐지지 않기를 바랐다. 클릭하는 순간 어둠을 거둬간 스크린처럼 오랜 체증이 내려갈지도 모르는데, 웅크린 채 울고 있는 나를 외면하거나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용기가 없었다.

책이 나올 때마다 지인은 이번에도 네 이야기를 쓰지 못했구나 하며 아픈 곳을 찔렀다. 그러는 것이 현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육신의 통증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은 그리움이다. 아무런 인사 없이 떠나면 다음 세상에서도 맨정신에 살지 못할 것이다. 엄마니까. 과거를 향해 발걸음을 돌린다. 매듭을 풀어야겠다. 많은 걸 포기하고 모진 세월 살았는데, 한 번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어도 되는 거 아닌가. 오늘은 현재형으로 쓴다. 낯선 곳으로 가는 길은 용기가 필요하다. 보고 싶다는 말로 첫발을 떼어본다. 지금은 휘청거리지만, 괜찮아지겠지. 틀을 깨니 가볍다. 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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